꿈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교감선생님이 수업을 들어오셨다. 오셔서 하신 수업 내용은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억에는 누구나 꿈을 가지면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는 아이들에게 각자의 꿈을 이야기해 보라고 질문했고,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손을 들며 자신을 시켜주길 바랬다. 다들 발표도 참 잘했다. 

"전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등등의 멋진 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혹시라도 나를 시킬까봐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때 교감선생님은 하필이면 나를 지목해서 일으켜 세웠다. 머리 속이 하얗게 되고 주목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왜냐면 난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감 선생님이 물었다. 

"학생은 꿈이 무엇인가?"
"전 꿈이 없습니다. "

아이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꿈이 없다니... 꿈이 없다니... 다들 멋지고 뚜렷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난 꿈이 없었다. 꿈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알게 되었다. 교감선생님은 허허거리며 아직 꿈을 못 찾아서 그런 것이지 꿈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며 앞으로 꿈을 찾아보라고 말하셨다. 

그 이후로 난 꿈에 목말랐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건 그 후로 몇년이 지나 아프리카에 갔을 때 찾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정신없이 놀고 방황하는 나를 본 교회 누나가 자신의 돈을 신청금으로 내서 나를 아프리카 선교팀에 넣어버렸다. 그렇게 아프리카로 의료 선교를 떠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해외에 가는 것이기도 했고, 아프리카라니 기대가 매우 컸다. 

아프리카 선교사

그러나 아프리카에 가서 내 모든 삶이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프리카는 내 생각보다 크고 광활했고, 척박했다. 케냐의 마사이 부족과 함께 1달간 지내며 많은 일들을 겪었다. 내 인생을 바꾼 사건은 한 아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의료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 아이가 배가 아프다며 의료팀에 찾아왔다. 우리는 배가 아프다니 내과로 보냈는데 내과에서 그 아이의 배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배 전체가 완전히 뭉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외과로 보냈지만 딱지를 만지기만 해도 피가 줄줄 흘렀다. 아이의 배가 그렇게 된 이유는 작은 화상 때문이었다. 배에 화상을 입었는데 2차 감염이 계속 되면서 상태가 그 지경까지 된 것이다. 마사이부족은 유목민족이라 집을 낮게 짖고, 소똥으로 짖는다. 소똥을 말리면 사람은 그 냄새를 잘 못 맡지만 야생 동물들은 멀리서도 그 냄새를 맡아서 잘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소똥이 많다. 그 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똥을 가지고 놀았으며 손에 소똥이 그대로 묻은 채 간지러운 배를 긁었고 상처 속에 병균이 들어가며 감염이 되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우선 치료를 했다. 모든 사람이 붙어서 팔, 다리를 붙잡고 치료를 했다. 치료는 어렵지 않았다. 딱지들을 떼어내고 드레싱을 한 후 소독약을 발라주고, 항생제인 마이신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다 나으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이신을 다 주어야 했다. 그 부분에서 의사 형들끼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이에게 모든 마이신을 다 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치료해주기 위해 남겨둘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물이 없어서 물 한컵이 바위 위에 올려져 있으면 그것이 기적인 나라. 학교도 있고 선생과 학생도 있는데 책과 공책과 연필이 없는 나라. 병원과 의사와 간호사와 환자가 있지만 약이 없는 나라. 전봇대가 있지만 전기가 안들어오는 나라. 물은 수도꼭지를 틀면 항상 콸콸 나오고, 책보기 싫어서 폐품으로 내고, 약이 넘쳐나서 그 이권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컴퓨터를 하루 종일 켜 두어도 되는 나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난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오리라 마음 먹었고, 아프리카 선교사를 꿈꾸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난 아프리카를 위한 프로젝트를 2개 진행하고 있고, 이 책이 나올 때 쯤이면 아프리카에 도서관을 건립해주러 갔다 왔을 것이다. 

아프리카 선교사의 꿈을 가진 후에 난 군대에 가게 되었다. 군대에서 우연히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잃게 되었고, 그 이후 내 꿈은 더욱 명확해졌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 군인의 신분에서 나도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군대에서 경영, 경제에 관한 책을 300여권 읽고 나오게 되었다. 그 이후 책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책 읽는 습관은 내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 군대에서 책을 읽다가 하나의 꿈을 더 꾸게 되었다. 바로 경제적 자유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자유 학교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란 자본이 주가 되는 곳이다. 자본이란 토끼와 사냥꾼이 있을 때 사냥꾼이 토끼를 잡기 위해 당기는 활과 화살, 그리고 토끼를 맞추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 자본의 결과는 토끼, 즉 생산물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좋은 자본이 되어야 한다. 좋은 자본이란 생산물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산물은 바로 돈을 의미한다. 종합해보면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을 많이 버는 혹은 벌어다주는 자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관은 물질만능주의에 휩쌓였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자본 취급을 받는다. 또한 좋은 자본이 되기 위해 온 인생을 투자한다. 그 본보기를 1998년에 절실히 느꼈다. 바로 IMF였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대부분 이 때 명예 퇴직을 하였다. 내 아버지도 30년간 다녔던 회사에서 그렇게 나오셨다. IMF 때 구제금융을 받았고 회사는 돈을 벌지 못했다. 그래서 구조조정을 했고, 구조조정의 뜻은 회사가 돈을 벌지 못하니 돈을 벌지 못하는 자본들은 좋은 자본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자본은 나쁜 자본이다. 그리고 나쁜 자본은 자본주의에서 주가 될 수 없다. 

IMF가 끝난지도 10여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때와는 별반 다를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대학생들은 큰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자본이 되기 위해 스펙을 쌓는데 4년을 투자하고 그도 모자라 취업 재수까지 한다. 취업을 해도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서로 좋은 자본이 되기 위해 경쟁을 한다. 그 경쟁은 맞벌이로 이어졌고, 맞벌이는 가족의 해체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오피스와이프, 오피스 허즈번드가 유행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좋은 자본이 되기 위해, 즉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다. 

인생은 한번이다. 불교에선 윤회 사상이 있지만, 윤회해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삶은 단 한번 뿐이다. 그리고 이 한번 뿐인 삶을 좋은 자본이 되기 위해 가정이 헤체되면서까지 올인하는 것은 불나방처럼 매우 어리석어보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기보단 좋은 자본이 되기 위해 좁은 길을 가려 한다. 거기서 내 꿈이 나왔다. 경제적 자유 학교를 만들어 경제적으로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자유하여 좋은 자본 되기 게임에서 빠져나와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그 학교를 아프리카에 만드는 것이 내 종합적인 꿈이다. 
Posted by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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